해피 엔딩 [소라쇼바+소라카부] *지인지원글

Ashley Euyoung Kim
18 min readDec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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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로 몇 번째 이런 상황인 걸까요.’

처음 든 것은 시시한 감상이었다. 그러니까, 모노크로우 섬도 자신의 숙소도 아닌 곳에서 눈을 떴을 때 말이다. 주변을 레몬색 벽지가 감싸고 펜던트 조명이 은은한 주황빛을 발산하는 곳에서, 소라는 두껍고 푹신한 침대 시트 위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아니, 애쓰려고 했다. 바로 직후 자각한 묵직한 압박감만 아니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로 위에서 복부와 허파를 압박하는, 이 무게감은 사람의… 사람?

소라는 눈에 힘을 주며 크게 떴다. 아직까지 잠에 취해 몽롱했던 정신이 한 번에 깼다.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깔아뭉갠 사람을 살펴보니, 제일 처음 눈에 띄는 것은 잿빛에 가까운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다음은 깎지 않은 수염과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긴 어려운 인상, 자신의 나이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먹구름이 낀 듯한 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소라는 단번에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하시모토 씨?”

초고교급 브로커. 아니, 이젠 그냥 브로커다.

하시모토 쇼바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라를 훑어보고 있었다. 관찰하듯이, 위아래로. 대놓고 무시당한 소라의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그녀는 하시모토가 방심한 틈을 타, 발차기로 그를 걷어차서 밀어내고 완벽하게 제압하는 상상도를 그렸다. 실제로 평범한 상태였다면 그것이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기반 기억은 ‘타이라 아카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녀의 근력 및 신체 능력 등도 똑같이 구현된 상태이므로. 그러나 그녀가 그 상상을 실천에 옮기려 했을 때, 애석하게도 그녀의 손은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바동거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하체는 깔려 있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상체만 이리저리 비틀리고, 애꿎은 침대 시트만 여러 방면으로 구겨졌다. 그리고 하시모토는, 대단하다면 대단할 정도로 일관된 태도로 묵묵하게 소라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가… 담배를 꺼냈다! 이 사람, 실내에서 담배까지 피우고 있다!

소라는 무심코 태클을 걸려고 하는 입버릇을 자제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끈질기게 입에 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니까요?”

참고로 이 과정에서 소라는 참을 인을 열 번 정도는 되새긴 것 같았다. 참을 인 열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으니. 그러나 하나 간과한 점은, 하시모토 쇼바이란 사람은 열 번 참으면 열한 번째 짓을 기어이 저지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담뱃불도 끄지 않은 채로 자신의 와이셔츠를 휙 걷어 올리기까지 하자, 소라는 순간 뒷목을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처음 보는 방 안에서, 하시모토 씨가 자신을 묶어두고, 옷을 벗기고…

“하시모토 씨 변태, 치한, 미친놈, 또라이, 돈미새 (돈에 미친 새끼)!”

악을 쓰듯 힐난하며 아까보다도 한층 격렬하게 발버둥 치자, 올라갔던 와이셔츠 자락은 다시 내려왔고 거센 반항에 하시모토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명등을 등지고 있어 더욱 그늘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어쩐지 검고 눅진한 타르를 신발 바닥에 정면으로 밟은 것 같은 탐탁찮은 표정이었다. 그는 탁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닥쳐봐, 백발…”

“싫어요. 하시모토 씨가 쓰레기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변태 저질 쓰레기일 줄은!”

“너는…”

그는 순간 어이가 사라진 표정을 짓다가, 됐다는 듯 다시 소라에게 손을 뻗었다. 파렴치한 같으니라고. 소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묶여 있던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소라가 힘이 세더라도, 묶여 있던 밧줄이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만화 영화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더럽게 단단하게도 묶어놨다. 그런 감상을 품는 사이에도 하시모토의 손길은 지척에 다가와 소라의 와이셔츠를 다시 쥐었다. 그 순간-

“미쳤어요?!?!”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고 둥근 고철이 하시모토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소라의 앞에 보이는 사람은… 기겁한 표정의 카부야였다. “카부-” 야 씨, 하고 말하려 한때였다. 하시모토가 실 풀린 인형처럼 소라의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카부야가 들고 온 프라이팬에 정통으로 맞은 덕분이었다.

*

“하마터면 학급 재판 열 뻔했네요.”

소라의 말에 카부야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그잔을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받아들곤, 소라는 한쪽 벽면에 있는 의자 위로 시선을 향했다. 아까까지 소라를 묶고 있던 줄은 이제 하시모토를 꽁꽁 동여매고 있었다. 의식이 있으면 한바탕 욕설을 들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아까의 충격으로 아직까지 기절해 있었다.

소라는 은은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에 놓여있는 옅은 녹색 방석과 식물이 방 안에 한층 온기를 더해주었고, 바닥엔 보기만 해도 푹신한 러그가 깔려 있었다. 벽의 한쪽 면은 완전히 창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햇빛이 그 사이로 투과하며 방 안에 내려앉았다. 따뜻한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소라는 카부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제일 묻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저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하고 형편 좋다.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소라는 이 추리에 한 가지 이유를 덧대었다. 꿈이라면 카부야 씨는 자신에게 제일 익숙한 형태로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이유를. 그러나 눈앞에 비치는 카부야는 검은 머리카락에 안경을 쓴,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소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키사라기 기관에 백업 데이터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거, 기억나?”

소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게 정말로 있었어.”

아, 그걸로 저를 백업한 거군요. 그리 말하려는 순간 소라의 말은 가로막혔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라고 하면… 온전치 못했다는 점일까.”

“온전치 못했다뇨?”

“…1년 5개월이 걸렸어. 우츠로시마에서 그, 끔찍한 일을 겪고, 너를 복구하기까지.”

벌써 1년 5개월이나 지난 것인가. 그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소라가 잠시 멍해진 사이 카부야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시간 동안 메카루와 기관 사람들은 너를 반듯한 ‘소라’로 만들기 위해 몹시 애를 썼고, 키사라기 기관의 가상 세계에서 너를 학습시켰어.”

산노지 군 같네요. 그 말이 입가 근처까지 맴돌았으나, 굳이 그 말을 해 카부야의 반발을 듣고 싶진 않았다. 소라가 말을 꾹 삼킨 것을 다행스럽게도 카부야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소라. 너를 만날 수 있게 된 거야. 다만 네가 깨어나는데 필요한 육신은 인간의 몸을 사용할 수도 없어서…”

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마지막 순간 마에다가 제 제안에 수긍했을지도 의문이었다.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의 죽은 몸으로 살아가는 일 같은 것은. 소라는 느릿하게 커피를 한 입 머금으며 카부야의 말을 기다렸다. 묘하게 다음 말까지의 공백이 길었다.

“…그래서 학습된 ‘소라’의 자아를 준비된 안드로이드에 넣었어.”

아, 커피 마시지 말걸. 마시던 커피를 장렬하게 뿜으며 헛기침했다. 제 가슴을 몇 번 두드리며 소라는 다시 물었다.

“안드… … 네?”

어느새 카부야는 말을 멈추고, 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라 또한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침 하늘 같은 청색 눈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맺혀 있었다. 슬픔, 기쁨, 원망, 미안함, 그리움, 걱정… … 바람에 흔들리는 투명한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 강렬한 감정에 그대로 부딪히며 부서졌다. 이 순간 소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부야 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에서 조금 바뀌었다. 그렇지만, 그 눈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과분할 만큼 상냥하고, 지나치게 다정했다.

내려앉은 정적을 깬 사람은 소라였다. 이 순간 해야 할 말,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다.

“카부야 씨. 쭉 하고 싶었던 말이 있어요. 들어주세요.”

“…응? 뭔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이전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녀왔어요.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로, 정말로 기뻐요.”

*

“…그래서 지금 이 난리를 피우고 있다 이거지…”

썩은 표정의 하시모토가 상황을 파악하고 그리 중얼거렸으나, 애석하게도 기절했다가 막 깨어난 남자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우 정말, 소라…~!! 이제 좀 놔줘!”

“카부야씨, 보고 싶었어요.”

부끄러워 하는 카부야의 몸을 끌어안고 놔줄 생각은 하지 않는 소라.

“소라…!”

그 말에 또 감동해 눈물을 글썽이는 카부야.

배경이 돼버린 한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둘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열성적으로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지난 1년 5개월 간의 이별을 보상하듯이. 주변에 꽃과 반짝이들이 흩날리고, 웅장하고 감동적인 영화 BGM이 흘러나와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멜로 영화였으면 틀림없이 하이라이트였을 장면이었다. 완전히 둘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두 사람을 보고, 하시모토 쇼바이가 내뱉은 감상은 한 줄뿐이었다.

“옘병들 떨고 있네, 진짜……”

한바탕 재회의 감동 나누기가 끝났을 땐, 하시모토는 이 이상 썩창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부야는 그제서야 하시모토를 풀어주며 반쯤은 타박하는 말투로 훈계했다. 내용은 주로 소라에게 함부로 손대지 말라느니, 막 깨어난 사람 괴롭히지 말라느니, 그러면 자기가 죽일 정도로 때려버릴 거라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그를 듣는 하시모토는 예의상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하품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카부야 씨. 하시모토 씨는 어쩌다 여기에?”

문득 든 의문에 카부야는 밧줄을 정리하다 말고 밝게 대답했다.

“응? 아, 모두 키사라기 기관이랑은 완전히 연을 끊었지만… 소라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모였어. 니지우에는 안 온 모양이고, 마에다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소라의 몸이 깨어난 뒤, 연구소를 뛰쳐나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이야기는 방금 막 전해 들은 찰나였다. 마에다 씨, 무사하셨으면 좋겠는데… 그런 상념에 잠겨 있다가, 소라는 문득 든 생각에 하시모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얼빵한 여자 데려와서 뭐 해? 귀찮기만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하시모토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소라는 그 눈빛을 뚫어져라 가만 응시했다. 빤히.

“뭘 봐?”

아, 예상했던 대로 심기 불편한 목소리다. 어쩜 이렇게 예상과 똑같은 반응을 보여주는 걸까. 소라는 이상한 부분에서 감탄했다. 그럼 아마 이 다음 올 말은…

“그냥 그 쪽에 볼일 있어서 내친김에 들른 거다. 뭐, 그러면 내가 먼 길 뺑뺑 돌아 너 보려고 여기 온 줄 알았냐?”

“네.”

“이게 진짜 미쳤나…”

“절 보려고 먼 길 뺑뺑 돌아 단박에 달려온 하시모토 씨를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어쨌든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건 맞는 거네요. 저 보고 싶어서.”

하시모토가 어이가 없어서 말도 못하고 있을 때쯤, 중간에 끼어든 카부야가 “자자, 그만~!” 하고 말하며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그녀는 과장스런 한숨을 내쉬곤, 양팔을 교차시켜 팔짱 끼곤 말했다.

“여긴 내가 잠시 빌린 아파트라서, 냉장고가 텅텅 비어있으니 지금 장을 보고 와야 해. 둘 다 싸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특히 하시모토, 넌 소라 털끝이라도 만지면 내가 이 집 cctv 영상 키사라기 기관에 확 보내버릴 줄 알아. 알겠어?”

으름장을 놓는 카부야의 표정은 꽤 무서웠는데도, 간이 배 밖에 튀어나오기로 유명한 남자는 얄미운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였다. “어이쿠, 무서워라.” 표정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말은 신빙성을 200% 정도 떨어트린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카부야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마뜩잖게 하시모토를 노려보다가 이내 문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하시모토가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cctv야 들어오던 순간부터 전파를 끊어놨는데 말이야. 소라는 그 말에 고개를 휙 돌렸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이죽대고 있는 하시모토 쇼바이와. 익숙한 표정을 본 소라는 실감했다. 비로소, 브로커 H와의 재회였다.

침묵이 내려앉는 와중에, 소라는 돌연 자신의 배를 들춰보았다. 짐승 (모노쿠마를 짐승으로 표현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의 앞발이 할퀴고 지나간 듯한 커다란 세 줄의 상처는 소라에게 줄곧 존재해왔던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아니, 이 육신에선 처음부터 없었던 게 맞나. 이전과 구분되지 않는 맨들한 피부에서, 그것만이 자신이 안드로이드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하시모토가 갑자기 변태 짓을 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나. 시선이 느껴져 소라는 고개를 들었다. 하시모토가 유심히 소라가 들춘 부분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지 마시죠?”

“누가 갑자기 노출쇼를 해서 말이야. 불가항력이라고.”

“저질 아저씨네요. 변태.”

“남 앞에서 갑자기 옷 들추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느 한 사람도 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티카티카는 짜증 나기 보단 이젠 친근하게까지 느껴졌다. 하시모토가 자기에게 져 주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일 것이다. 아니면 세상이 멸망하는 날이라던가. 소라는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며 와이셔츠를 내렸다. 다시, 방 안에 적막이 흘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맞댔다. 소라가 먼저 입을 열어 공기를 깼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떻게 지내긴, 넌 내가 뭐 할 거라고 생각하냐?”

“범법행위죠.”

“잘 아네.”

또 실없는 티카티카. 그러나 소라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주 작고, 사소한, 미묘한 위화감. 너무 미세한 차이라 그녀가 아니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의 균열. 소라는 그를 눈치챘다.

“하시모토 씨.”

“왜.”

심기가 불편한 것뿐만 아니다. 묘한 이질감이 있었다. 대화의 내용에서? 아니. 대화는 평소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뛰어난 브로커라는 것은 곧 뛰어난 연기자이 고, 우수한 거짓말쟁이라는 뜻도 된다. 드러나는 말에서 차이점을 찾으려는 것은 무의미했다. 오히려 평소와 다른 쪽은…

“왜 절 그런 눈으로 보세요?”

“무슨 눈.”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은 들은 적 있다. 그 말대로, 하시모토는 대부분의 말과 행동에서 평소와 같은 상태를 유지했으나 짙은 잿빛의 눈만은 명백하게 달랐다. 소라는 되받아치는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담담한 눈 너머에선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 꼭 카부야 씨처럼… … 생각하던 소라가 내린 결론은 전혀 하시모토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답을 확신이라도 하듯이, 툭 뱉었다.

“하시모토 씨, 저 보고 싶으셨구나.”

그리고 이어질 부정을, 차가운 타박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침묵만이 실내에 가라앉았다. 소라는 의이함에 눈을 깜빡이며 하시모토를 바라보았다. 하시모토의 얼굴을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하고, 심드렁해 `보였다’. 하지만 소라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균열처럼 번지는 당혹감을. 꼭 지금 말을 계기로 어떤 발화점을 완전히 넘어버린 것처럼, 감정이 기포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톡. 어떤 자극도 주지 않았는데 그대로 꺼졌다.

오히려 당황하는 쪽은 소라였다. 아, 오늘이 바로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인가. 아니면 세상이 멸망하는 날이던가. 부활하자마자 세계 멸망이라니 그런 빅 이벤트는 사양하고 싶은데. 실없는 생각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가슴 속에선 이상한 감각이 들끓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도 아닌데 세상이 일렁였다.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도리어 솜사탕을 먹는 것처럼 몽글몽글하고, 간질간질하고… … 소라는 감정의 실마리를 잡고 사유한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하면 알 것 같았다. 이 감정의 정체를.

바로 그때, 하시모토가 고개를 홱 돌렸다. 가면이 완전히 벗겨진 듯한 느낌이 싫었던 건지, 그 목소리는 명확히 날 서 있었다.

“좆같아서 못 해 먹겠네, 진짜…”

아니. 이걸 날 선 것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소라는 그 목소리에서 처음 봤던 그의 표정을 떠올렸다. 검고 눅진한 타르를 신발 바닥에 정면으로 밟은 것 같은 음울하고 음영 진 얼굴. 왠지 모르게, 지금의 그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소라의 생각을 기다려주지 않고 등을 휙 돌렸다.

“나 간다.”

더는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소라는 생각보다 먼저 하시모토의 손목을 붙들었다.

“잠시만요!”

“뭐야?”

“카부야 씨가 3인분 장 봐올 거 아니에요. 끼니 해야죠.”

“…너는 진짜…”

“왜요.”

“..됐다고. 이제 가려니까 잡지 마.”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발걸음을 떼려 했으나, 소라는 붙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결국 짜증이 섞인 얼굴로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야, 백발, 너… 하시모토의 입에서 무어라 한 소리가 나오려 했지만,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던 소라는 말을 끊었다.

“가고 나면 다신 안 올 거잖아요.”

흔들림 없는 갈색 눈동자. 직구로 던지는 말. 하시모토는 ‘내가 왔으면 좋겠느냐’ 라던가, ‘날 왜 그렇게 좋아하냐’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투로 말했다.

“당연하지. 그럼 내가 너랑 만나서 쎄쎄쎄라도 하리? 우리가 소꿉놀이라도 할 사이냐?”

비꼬는 듯한 말투. 저건 일부러 과장한 거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소라에게 그의 말은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건 아니죠.”

“그래, 그러니까-”

“그래도 가지 마세요.”

“………”

“카부야 씨가 밥 해온대요. 먹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봐요.”

어떻게, 정말 애매한 말이었다. 이대로 하시모토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그의 조수가 되어 범법행위를 저지르면서 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소라는 실로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제3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간단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일단 먹고 나면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하시모토 씨, 배고파서 더 예민해지신 것 같아요. 걸핏하면 저한테 짜증내시고…아, 이건 평소에도 이랬지만.”

하시모토는 살짝 입을 벌렸다가, 그 형편 좋은 해결책을 들은 뒤부터 완전히 본래 페이스를 되찾았다. 기포는 다시 가라앉았고, 처음 보던 아까의 감정은 씻은 듯 사라졌다. 배고파서 예민해졌다는 말 이후부턴 온통 짜증과 귀찮음, 황당함과 어이없음으로 얼룩져 있었다. 평소처럼. 아니지, 자신의 평소는 불과 어제 같은데. 이 사람에게는…

“하, 이런 여자나 무슨 얘길 하겠다고. 됐어. 붙잡지… …”

세 번째로 도망치려던 하시모토의 시도는 어김없이 실패로 돌아갔다. 심지어 하시모토 치곤 드물게 말까지 끊겼다. 불가항력이었다. 등 돌린 하시모토의 뒤에서 단숨에 부드러운 온기가 맞닿았기 때문에.

“너…!”

그를 도망치지 못할 정도로 꽉 끌어안은 소라는 귓가 근처에서 나직히 복창했다.

“가지 마세요.”

비치는 옆얼굴 사이 눈은 잔뜩 커지며 흔들렸다. 기이하게도 그 눈을 보자, 조금 전까지의 불안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보는 하시모토의 새로운 모습이 좋았다고 하면 그는 또 화낼까. 하시모토는 소라를 떨쳐내려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 세게 하시모토를 옥죌 뿐이었다.

“시발, 아프다고..!”

“어머. 죄송해요, 안드로이드라서 힘 조절이 안 되네요.”

처음 깨어났을 때와는 입장 역전이다. 이번에 바동거리며 몸을 비트는 것은 하시모토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소라는 밧줄인 셈이었다. 물론 안드로이드의 팔은 밧줄보다도 훨씬 튼튼하며, 이상하게 하시모토를 놓아줄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아니. 아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는 쪽이 정확할까. 하시모토 쇼바이에겐 완전히 외통수였다.

“슬슬 포기하시는 게 어때요? 똑똑한 하시모토 씨라면 힘 낭비도 싫어하실 텐데.”

“씹… 무식하게 힘만 센 게…”

“힘만 세다뇨. 전 타이라 아카네이기도 한 거 잊으셨어요? 기술력, 사회성, 가사 능력까지 만능이라고요. 완전 조강지처네요.”

“조강지처? 잘 봐줘도 가정용 안드로이드겠지.”

“낭만 없기는. 가끔 그 두 개는 별 차이 없답니다.”

한참을 저항하다 결국 하시모토는 폭삭 늙은 표정을 지으며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나 소라는 여전히 그를 놔주지 않았다. 한바탕 소란과 입씨름 이후엔 다시 침묵. 시계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만이 유난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이번엔 하시모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백발.”

“왜 그러세요?”

“넌 대체 뭐 때문에 날 그렇게 붙잡는 거냐?”

소라는 바로 대답하려고 했으나, 하시모토의 목소리는 맺힌 게 많아 보였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쏘아붙이는 말들이 이어졌다.

“솔직히 그렇잖아. 조수도 싫다, 범법행위도 싫다, 그럼 뭐 때문인지 도저히 납득가지 않는데. 네가 나랑 있는다고 이득 되는 게 하나 있기나 해?”

그 딴에는 잘 쏘아붙였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 말을 들은 소라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쿡쿡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흩어졌다. 어쩐지 즐겁고도, 기분 좋은 음색.

“그 말 전에도 여쭤보셨던 것 같은데. 뭐 좋아요. 다시 대답해 드릴게요.”

하시모토는 웃음소리에 짜증을 내려던 것을 멈추곤, 시선을 돌려 소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소라는 즐거운 낯 그대로 이야기했다.

“딱히 별 이유는 없어요.”

애초에 그는 클라이언트의 비밀을 캐는 건 비매너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 역시 전에 했던 말을 상기했는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만큼은 답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답에 직면한 사람처럼. 소라는 그를 위해 좀 더 설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하시모토 씨랑 같이 끼니 하고 싶고, 영양가 없는 대화도 하고 싶고, 무엇보다 이렇게 바로 헤어져서 다신 못 볼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아요. 물론 변태 짓이나 범법 행위는 사양하고 싶지만요. 아, 흡연도 안 되고요.”

이런 와중에도 농담이냐고, 라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난 얼굴에도 소라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거기에 이유 같은 건 없어요. 단지 제가 원할 뿐… 그걸론 부족한가요?”

하시모토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런 이유에 하시모토가 반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하시모토 쇼바이라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원하고, 욕망하기에 행동한다. 그는 그런 원초적 원리대로 살아왔으며 인간은 다들 그렇다고 생각했기에. 설령 상대가 알고리즘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백발 여자라 인정한 순간 마찬가지였다.

“골 때린다, 너 진짜… 가면 갈수록 이해가 안 되네.”

결국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를 기민하게 파악한 소라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말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죠?”

하시모토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은 어떤 때엔 그 자체만으로 답이 됐다. 둘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하시모토 쪽은 손만 자유롭다면 제 머리를 마구 헝클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씹… 내가 어쩌다 이런 여자랑 얽혀서는…”

소라는 알 바 아니라는 듯 그 말을 무시했다. 대신 감각에 집중하기로 했다. 두 팔에 가득 들어오는 그의 단단한 몸, 담배 냄새가 섞인 체향, 천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 소리에. 쿵, 쿵, 하고 규칙적으로 뛰는 소리가 침묵을 매웠다. 게으른 햇살이 창문 사이로 흘러 들어왔다.

비로소 해피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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