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BS를 창설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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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이 90% 이상인 학교에서 옆자리가 과학 실험 동아리라면 적신호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 부스엔) 전부 눈짓만 살풋 주고 지나간다. 지리도 한몫을 했다. 하루만 주어지는 동아리 홍보 오후인데, 우리는 1층이 아니라 2층을 배정받은 탓에 계단을 오르기 귀찮았던 80%의 학생들은 우리의 존재조차 모르게 된 것이다.
조명도 밝지 않은 공간에서 창문에 누가 미리 붙여둔 우리 동아리 포스터들은 쓸쓸해 보였다. 나와 아니카는 빈 공간에 작은 그림들을 덧그리고, 가져온 사진들을 오려 벽에 붙였다. 그럼에도 홍보 효과가 나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다음부턴 작게 작게 뽑지 말고 뽑더라도 A3 포스터 정도로는 뽑는 게 낫겠다.)
다음은 접객(?)이다. 학생들이 한 명씩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상냥하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황을 좋개 바꿔주진 않더라. 일단은 아니카가 아시안이 아니니 영어 스피킹 실력 키우기에 야망을 가진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오산이였다. 하긴 우리 케이스가 겉으론 영어 토론 케이스도 아니고.
‘스탠드업 코미디’라는 장르가 생소하다는 사실도 큰 몫을 했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스탠드업 코미디의 사전적인 의미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것 또한 큰 장벽이 되었으리라 추측한다. 우리는 어쩌다 말을 걸어오거나 우리 포스터 앞에 멈춰 선 극 소수의 아이들에게 스탠드업 코미디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했다.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동아리는 2인 동아리가 되었다.
나랑 아니카. 이렇게 2인인 것이다.
인원이 너무 적지 않느냐고 물으면… 맞다. 분명 규정상으론 최소 15명이 필요하다는데 정작 나는 지금껏 이 학교에서 동아리를 창설하거나 맡아오며 그런 동아리는 당최 본적도 참석한 적도 없다. (아카데미나 프로덕션이면 모를까.)
…그렇다 해도 통상 부원이 8~13명은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진짜 2인이다. 쌩 2인. 두 명. 두 사람. 이렇게 둘이서 Term 4 DIBS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해시태그 #twosadcomedians
아예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아니다. 예감은 분명히 경고했다. 일전에 마케팅이나 일종의 홍보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고심하면서도 결국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한 줌 되는 후배들에게도 동아리를 전혀 홍보하지 않았고, 쇼케이스도 보다시피 불안하게 흘러갔다. …그래도 누군가는, 정말 누군가는 낚여서 입부 신청서를 들이밀고 줄줄이 소세지처럼 들어올 줄 알았다. 적어도 한두 명은 말이다. 고백하건대 그게 내 인원 대책이였다…
하지만 잘 흘러가지 않았으니 12학년으로 다시 돌아가면 적극적인 홍보를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이미 11학년이 끝났으니까 말이다. DIBS는 매력적인 포텐셜을 가진 동아리다. 아니카에게 밝힌 전적이 있듯, 나는 이 동아리가 명맥을 가지고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게 내 야망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고작 반년 정도가 남았으니 전통을 만들기엔 일정이 아주 빠듯하다.
단순한 스탠드업 코미디가 아니기에 더 의미가 있다. 학교 시스템을 조롱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겠지만 (사실 어느 정도 그렇기는 하지만…) DIBS의 의의는 바로 거기에 있다. 특정한 우리의 커뮤니티, 학교 커뮤니티 단계에서 직접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들을 특별히 선정하여 스탠드업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DIBS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게다가 이 학교 안에서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가령 IB 시스템에 대한 농담이나, 이곳 기숙사 생활, KIS 커플의 데이트를 보고 놀랐던 일화 등은 모두 이 학교 내에서 이야기 하지 않으면 이해하거나 재미있어 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 순간, 이야기는 배로 재미있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insider joke의 묘미다.
Insider Joke(인사이더 조크, 내부자들만 이해하는 농담)는 언뜻 외부에 공격적으로, 혹은 폐쇄적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Insider joke의 존재는 커뮤니티를 돈독하게 만들고, 그 커뮤니티에 고유한 문화가 무엇인지를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가졌다. 또, 우리 커뮤니티가 어떻게 돌아가고 소통하는지에 대해 돌아볼 수 있게 한다.
나는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거나 깨닫지만 못할 뿐이지, 교내에 정말 재미있는 문화가 많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사소한 이야기들부터 시작해서 이 학교라는 기관, 혹은 IB라는 시스템 자체에 가진 순수한 불만이나 긍정 모두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하지만 누가 말해주고, 정립하지 않으면 이런 자산은 모래처럼 부스스 날아가 사라진다. 마치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후손의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이미 조용하게 떠나간 선배들의 그림자를 우리는 많이 잃었다. 물론 기록할 수도, 영상으로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뇌에 생생하게 이야깃거리를 남기려면, 역시 말만 한 것이 없다. 따분한 강연은 아무도 원치 않는다-그야말로 스탠드업이 필요한 때라고밖에는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내 대-스탠드업-목표이자 동기다. 사소하면서도 위대하고, 하찮으면서도 확실하다. 아직 많은 일들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첫 발걸음이 될지도 모른다—아니, 이미 분명하게 내딛은 발자국이다!
코로나가 있고, 내용도 문제가 있고, 부원은 부족하며, 홍보가 모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찬 예감이 다시 가슴 안을 비집고 퍼진다. 내 계획은 스탠드업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홍보하고 어셈블리에 올리는 것. 영어 스피킹과 드라마적인 요소를 강조해 어린 부원들도 끌어들이는 것. 이렇게 하면 본전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니카와 함께 실라버스 비스무리한 걸 만들어 적절한 때에 미들스쿨 기숙사에서 스탠드업 퍼폼을 하는 것. (두려움을 극복하는 게 중요하다) 또 인스타도 활성화시켜 놓아야 하고. …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려고, 또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글을 쓴다.
막연히 계획을 세우지만 까먹기도 하고, 그때 가면 귀찮거나 무섭기도 하다. 특히 나도 무대 공포증 비스무리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스탠드업을 좋아하면서도 무섭고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아니카는 잘 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말했듯이 스탠드업에 대한 내 열정만은 진짜다. DIBS를 학교의 자산으로, 전통으로 남기고 싶다면 응당 바빠야 하고 무서워야 한다. 이게 무슨 대단한 기관도 아니지 않나.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작은 스탠드업 투어들을 마칠 것이고, 괜찮은 후배를 점 찍을 것이며, 그 후배에게 리더 자격을 일임하고 졸업해 동아리의 명맥이 유지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 한다.